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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억하는 리영희 ② 김동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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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민 민주화운동 기념공원 소장
기사입력 2020-11-22

편집자주) 리영희 선생 10주기 추모하며 생애 마지막 16년을 보낸 군포에서 선생을 기억하는 이들의 글을 기고 받아 연재한다. 25년 전 군포시민신문의 발기인으로 지역신문 창간 지원에도 아낌없이 지원하셨던 선생께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추모한다.


 

 

“나의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眞實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리영희 선생님의 『우상과 이성』 서문에서 나오는 문장으로, 많이 인용되는 글이다. 아시다시피 선생님은 평생 저널리스트였다. 진실 추구는, 저널리스트로서 당연한 지녀야 할 덕목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이 회자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내 판단으로는, 이 말의 의미를 온전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본다. 

선생님은 진실이 담기지 않는 글은 쓰지 않았다. 진실은 글을 쓰는 목적일 뿐만이 아니라 철학이고 방법론이었다. 기자 시절 취재를 하거나 외신을 번역해 기사로 만들 때, 또는 짧은 칼럼을 하나 쓸 때도 확인에 확인을 거듭해 진실에 대한 확신이 섰을 때라야 글을 완성했다. 이때 진실이란 과학적으로 검증된 진술이다. 

요즈음 기자들은 기사를 사실의 기록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유명한 사람의 말이나 보도자료를 검증 없이 받아써놓고 기사라고 한다. 진중권과 그 아류들이 낄 데 안 낄 데 가리지 않고 촉새처럼 나불대면 바로 기사가 된다. 사실이라는 얘기다. 검증은 없다. 

선생님이 그토록 진실 확인을 강조한 배경에는 자연과학에 대한 학습이 있다. 해양대학 시절 배운 과목들이다. 천문학, 천문항해학, 선박운용술, 기상학, 구면삼각법, 조선학(造船學), 무선통신학 등. 흥미를 느끼지는 않았지만 성적은 우수했다. 자연과학에 상상력은 중요하지만 과학적 검증은 필수다. 오로지 발견, 법칙, 진실만을 추구한다. 진실에 철저한 철학은 이렇게 해양대학 시절에 형성된 것이다. 『역정』에는 이런 글이 있다.

 

“그 굴절 많은 인생 곡선은 미분학적으로는 어느 부분이나 삶의 목표와는 편차가 있지만, 긴 세월을 지나고 보니 적분학적 토탈로서는 그런대로 다 나의 삶에 기여한 것이라고 자위한다.”

 

해양대학에서 배운 내용이 이렇게 튀어나오는 것이다. 천문학이나 천문항해학에 미적분은 필수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자동차를 운전해간다고 할 때, 변화무쌍한 순간순간의 속도를 측정하는 것이 미분이고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 합산하는 것이 적분이다. 거리를 미분하면 속도가 되고, 속도를 미분하면 가속도가 나온다. 거꾸로 가속도를 적분하면 속도가 되고, 속도를 적분하면 이동거리가 계산되어 나온다. 이 원리로 굴곡진 선생님의 인생을 회고한 것이다.  

『전환시대의 논리』의 ‘조건반사의 토끼’에 이런 얘기도 있다. 일그러진 언어로 전달되는 사상이라는 것은 “사각형을 보고 삼각형이라는 표면의 언어로 전달된 사상이 상대방에게 삼각형의 형상을 재구성케 하는 절차”라는 것이다. 냉전의식에 젖은 사회의 모습을 비유한 것이었다.

왜 하필 토끼일까? 토끼는 포유동물이다. 파충류는 호흡 등 생존에 필수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뇌간과 기억과 감정을 담당하는 변연계만 있는 반면에, 포유류는 감각기관을 통해 확인한 정보를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감정을 제어하는 전두엽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뇌에서 차지하는 전두엽의 비율이 가장 크다. 인간이 30%, 침팬지 11%, 개 7%, 고양이 3%의 비율이다. 

토끼는 전두엽의 비율이 최소로서 거의 파충류의 뇌에 가까울 것이다. 따라서 외부의 자극에 절제하지 못하고 조건반사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비록 가장 진화된 뇌를 가지고 있는 인간 종이라 해도 진득하지 못하고 촉새처럼 반응한다면 토끼 수준이 되는 것이다. 특히 토끼는 스트레스에 매우 민감해 죽어버리기도 한다. ‘조건반사의 토끼’형 인간들의 사회적 수명은 길지 못할 것이다. SNS 시대에 인간의 뇌는 파충류 수준으로 퇴보할 것이라는 극단적 전망도 있다.

선생님을 기억하고 추모하고 본받고자 하는 마음은 아름답다. 단, 선생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전제를 충족시켜야 한다. 선생님이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이 진실의 추구라는 말을 기계적으로 기억하는 게 아니라 맥락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러한가? 그리고 그렇게 실천하고 있는가? 진실이 상실된 탈진실의 시대에 저항하며 올바로 처신하고 있는가? 과거의 인연을 앞세워 매명하는 사람은 없는가? 선생님은 돌아가시기 전 자신의 이름으로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널리즘과 사회의 진보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리영희 재단의 하는 일을 보면 공허하다. 선생님이 잘한다고 하실까? 

객관보도란 진실보도를 의미한다. 진실은 객관의 영역이다. 선생님이 말한 진실에서 주관이 들어갈 여지는 없다. 그러나 오늘의 언론에는 주관이 난무하다. 선생님의 뜻을 계승한다는 사람들도 검증 없는 주장이 강하다. 미국의 이론을 추종하는 언론학 교과서에는 진실보도를 강조하면서 객관보도는 불가능하다고 되어 있다. 

선생님이 예로 들은 삼각형은 세 개의 점과 세 개의 선분으로 이루어진 다각형으로 정의된다. 문제는 점과 점을 이은 게 선인데 현실에서 선은 그릴 수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면 부피도 넓이도 없는 가장 작은 단위가 점인데, 그 점은 상상으로만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점을 찍고 선을 긋는다. 그리고 그것을 상상의 세계와 가장 근접한 모양으로 일치시킨다. 그 상상의 세계가 객관의 영역이고 그곳에 진실이 있다. 천문학과 구면삼각법을 공부한 선생님이 추구한 진실도 그러한 것이다. 이 맥락을 건너뛰고 진실을 논하고 선생님의 정신을 계승하고 추모한다는 것은 공허하다.    

 

▲ 리영희 선생 내외 분과 (사진=김동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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